국민성장펀드 선정 VC로 출자기관 문의 쇄도
"우리도 펀드에 끼워주세요" 갑을 역전
넘쳐나는 자금, AI·로보틱스 등에만 몰려
창업 3년이하 투자건수 늘었는데 투자액 줄어
지난 4월 말 국민성장펀드 1차 출자사업 접수 마감일. 서울 여의도 산업은행에는 제안서를 든 운용사(GP) 실무자들이 몰려 접수처가 번호표를 배부해야 했다. 1차 사업에 도전한 운용사는 81곳, 전체 경쟁률은 평균 7.4대 1이었다. 신생 운용사 대상 부문은 17.5대 1을 기록했다.
번호표까지 뽑아가며 따낸 자리의 위력은 컸다. 한 투자은행(IB)업계 관계자는 "국민성장펀드에 선정된 운용사한테 출자자(LP)들이 돈을 싸들고 가 '내 돈도 좀 받아달라'고 하는 상황이 펼쳐지고 있다"고 말했다. 선정된 한 운용사 관계자는 "20년 평생을 우리가 설명회를 열고 직접 찾아다녔는데, 이번에는 오히려 LP측에서 먼저 참여 가능 여부를 묻기도 한다"며 "최근엔 출자자 미팅만 일주일에 3~4건씩 소화했다"고 했다. 일부 GP는 구두 약정만으로 며칠 만에 자금 조달을 마친 것으로도 전해졌다.
1년전만 해도 '돈 가뭄'에 시달리던 벤처캐피털(VC) 시장이 올 들어 정부의 모험자본 공급 확대 기조와 국민성장펀드 가동으로 달아오르고 있다. 중소벤처기업부에 따르면 올해 1분기 신규 벤처펀드 결성액은 4조4000억원으로 역대 최대였다. 하반기에는 국민성장펀드 위탁운용사들이 결성하는 펀드까지 더해진다. 그러나 급격히 불어나는 유동성의 이면엔 양극화와 거품 우려가 함께 자라고 있다. VC는 남의 돈을 맡아 불린 뒤 정해진 기한 안에 돌려줘야 한다. 자금을 모으기는 쉬워졌지만, 돌려주는 일까지 쉬워진 것은 아니다.
LP가 GP를 찾아가는 시장으로
VC 시장의 열기를 끌어올린 국민성장펀드는 정부가 5년간 200조원을 목표로 조성하는 정책펀드다. 당초 100조원으로 구상됐다가 150조원으로 확대 출범했고, 다시 200조원으로 증액됐다. 이 가운데 기업 지분에 투자하는 자금은 50조원 규모이며, 나머지는 대출과 보증 등으로 공급된다. 올해 1·2차 출자사업을 통해 위탁운용사 18곳을 확정했고, 이들이 연내 결성할 펀드는 5조5000억원을 웃돈다. VC 시장이 직접 받아가는 몫은 이 가운데 일부지만, 시장 분위기를 돌려세우는 데는 충분했다.
LP들이 앞다퉈 출자에 나서는 데는 이유가 있다. 국민성장펀드 자펀드에는 은행 출자 시 적용되는 위험가중치를 4분의 1로 낮춰주는 특례가 붙었고, 출자 실적은 정부의 생산적금융 평가와 직결된다. 과거에는 국민연금과 산업은행이 핵심 LP로 먼저 들어오고 민간 금융사가 뒤를 받쳤지만, 지금은 산업은행이 기존 출자 여력의 상당 부분을 국민성장펀드로 돌렸고 증권사·캐피탈 등 기존에 VC에 출자하던 금융사들도 여기 말고는 눈을 두기 어려워졌다.
정책자금이 민간 출자를 끌어당기는 구조는 국민성장펀드만이 아니다. 중소벤처기업부는 지난 13일 연기금·금융회사·기업 18곳과 함께 1조원 규모로 결성할 'LP성장펀드'를 출범시켰다. 올해 4분기 안에 운용사를 선정할 계획이다.
자금이 몰리면서 일부 GP들은 어느 LP에 얼마를 배정할지까지 고민하는 상황이 됐다. 1차 선정 GP 상당수가 결성 목표를 허용 상한인 최소결성액의 200%로 올렸고, 일부 인기 리그엔 목표액의 4~5배에 이르는 출자 의향이 들어왔다. 한 운용사 관계자는 "출자확약서(LOC)를 끊어주는 만큼 출자금이 배분되지 않을 수 있다는 점도 미리 알리고 있다"고 말했다. 시장의 관심은 자연스럽게 투자처로 옮겨가고 있다. 그는 "국민성장펀드를 받은 하우스들은 펀딩은 대부분 끝났다고 보면 된다"며 "이제는 돈을 모으는 경쟁이 아니라 좋은 회사를 먼저 찾는 경쟁"이라고 말했다.
몸값은 뛰고, 초기 투자는 마르고
펀드 결성이 수월해졌다고 투자할 만한 기업이 함께 늘어난 것은 아니다. 국민성장펀드 자펀드의 투자 대상이 인공지능(AI)·반도체 등 첨단산업으로 겹치면서 여러 운용사가 같은 기업을 동시에 검토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 기업들의 몸값 요구도 덩달아 높아졌다. VC업계 관계자는 "기업들도 대규모 자금이 시장에 들어온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보니 적정가치에 대한 기대치도 높아진 상황"이라며 "예상가치보다 두세 배 높은 밸류에이션을 제시하는 사례도 나타나고 있다"고 말했다.
자금 쏠림에 이은 또다른 문제는 양극화다. 더브이씨(TheVC)가 올해 5월까지 집계한 자료에 따르면, 창업 직후 초기 투자 단계인 시드~시리즈A 라운드에서 100억원 이상 대형 딜은 건수로는 10%였지만 투자금의 75%를 차지했다. 시드 투자금 가운데 AI·로보틱스 비중은 91%였다.
중기부 집계를 보면 올해 1분기 창업 7년 초과 후기기업 투자는 35.9% 늘었다. 반면 창업 3년 이하 초기기업은 투자받은 기업 수가 8.9% 늘고도 투자액은 되레 9.5% 줄었다. 딥테크로 자금이 몰린 영향이 크다. AI·반도체 등 12대 신산업에 지난해 5조2000억원이 투자돼 전체의 76.4%를 차지했는데, 이 돈의 6.9%만 창업 3년 이하 기업에 갔다. 반면 딥테크가 아닌 나머지 분야에서는 37.3%가 3년 이하 기업 몫이었다.
인력 시장에서도 유사한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대형 VC 공채에는 지원자 경쟁률이 수십대 일도 나오지만, 기술 이해도와 투자 트랙레코드를 함께 갖춘 경력직은 많지 않다는 게 업계 평가다. 실무 역량을 갖춘 10년차 이하 인력 경쟁이 심화하면서 연봉도 2억원 가까이 책정하는 경우도 있지만 적격자를 찾지 못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불려서 제때 돌려줄 수 있을까…회수 절벽이라는 과제
비슷한 시기에 같은 섹터로 자금과 인력이 몰리는 구조를 두고 우려도 나온다. IB업계 관계자는 "시차도 없이 특정 인기 섹터에 집중하는 펀드들이 대거 결성되고 있기 때문에 향후 회수 성적표에도 관심이 쏠릴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벤처펀드는 통상 8년 안팎의 만기 안에 투자금을 현금으로 바꿔 출자자에게 돌려줘야 한다. 회수 성과가 부진하면 성과보수를 못 받는 데서 끝나지 않고 다음 펀드 결성이 막힌다. 정책자금이든 민간자금이든 이전 펀드의 성적을 보고 들어오기 때문이다.
VC업계는 최근 몇 년을 '회수 절벽'이라 부를 만큼 부담에 시달려 왔다. 글로벌 데이터업체 피치북 집계 기준 지난해 국내 VC 회수 실적은 2017년 이후 최저 수준이었고, 투자 후 회수까지 걸리는 기간은 중앙값 5.9년으로 늘었다.
2019~2022년 조성된 53조원 규모 펀드가 순차적으로 회수기에 접어든 가운데 올해 만기가 도래하는 물량만도 약 17조원에 달한다. 회수가 늦어지면 출자자에게 돌아갈 돈이 묶이고, 그 자금이 새 펀드로 재투자되는 선순환도 함께 끊긴다. 금융당국과 금융투자협회가 2조원 안팎의 벤처투자 세컨더리 펀드를 조성해 회수 지원 방안을 추진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세컨더리 펀드는 기존 펀드가 보유한 지분을 사들여 유동성을 공급하는 방식이다. 금융당국도 산업은행과 모태펀드를 통한 회수시장 지원을 검토하고 있다.
최근 코스닥 반등은 그나마 숨통을 틔우는 요인이다. 7월 말 644선까지 밀렸던 코스닥지수가 열흘 만에 850선을 회복하면서 주요 회수 통로인 기업공개(IPO) 여건도 개선될 수 있다. 다만 지금 조성되는 펀드의 회수 시점은 수년 뒤라는 점에서 해결책은 될 수 없다.
그렇다고 정책이 회수까지 책임지기는 어렵다. 정부는 운용사에 출자할 수 있고, 투자 지분을 다른 투자자에게 되파는 세컨더리 시장에 유동성을 보탤 수도 있다. 그러나 투자한 기업이 얼마나 빨리 성장할지, 시장이 그 지분을 어떤 가격에 사줄지는 정책으로 정할 수 없다. 이는 순전히 운용사의 역량이다.
지금과 같은 환경에서 운용사의 투자 판단과 성과는 달라질 수밖에 없다. 펀드를 한데 모아 대형화에 집중하는 곳이 있는가 하면, 해외 거점을 늘리거나 아예 정책자금과 거리를 두는 곳도 있다. 국내 대형 VC 하우스별 대응은 이미 갈리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