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술과 의료 현장 사이 간극 설명
보험·병원·의사·환자 움직여야 시장 열린다
복잡한 산업 진입 장벽 이해 도와
인공지능(AI)이 질병을 찾아내고 디지털 치료제가 기존 치료를 보완하는 시대다. 그러나 실제 의료 현장의 변화는 기술의 발전 속도보다 더디다. 헬스케어는 병원과 보험 체계, 의사와 환자의 판단, 규제와 임상 근거가 복잡하게 얽혀 있는 산업이기 때문이다.
내과 전문의에서 컨설턴트와 저자, 스타트업 투자자로 활동 영역을 넓혀 온 김치원 카카오벤처스 부대표의 신간 '헬스케어 비즈니스의 법칙'은 기술과 의료 현장 사이에 존재하는 이러한 간극을 설명한다.
같은 질병이라도 환자마다 진행 양상이 다르고 발병 원인도 제각각이다. 의료적 결정은 한번 내려지면 되돌리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 잘못된 판단은 비용 손실을 넘어 신체 기능과 생명, 나아가 삶의 방향까지 바꿀 수 있다. 의료가 단순한 '최적화'보다 '후회 최소화'의 문제에 가까운 이유다.
저자는 의료를 '고위험 신용재'로 규정한다. 환자가 의학 논문을 직접 읽고 적절한 치료법을 선택하기는 어렵다. 결국 의사의 전문성을 신뢰하고 진료 지침과 규제기관의 승인, 보험 급여 여부 등을 통해 해당 치료가 믿을 만한지 판단한다. 새로운 기술이 시장에 안착하려면 의사가 이를 기존 진료 과정에 자연스럽게 적용할 수 있어야 한다. 보험자가 비용을 지불할 만큼 환자의 치료 결과를 개선한다는 사실도 입증해야 한다.
제약과 의료기기 시장의 차이에서도 헬스케어 산업의 복잡성이 드러난다. 저자는 "제약은 물질을 팔고 의료기기는 절차를 판다"고 설명한다. 신약은 막대한 연구개발비와 장기간의 임상시험, 높은 실패 확률을 감수해야 한다. 하지만 일단 승인을 받아 표준치료로 자리 잡으면 여러 병원과 환자에게 비교적 동일한 형태로 확산될 수 있다.
반면 의료기기는 병원 안에 실질적으로 자리를 잡아야 한다. 장비를 설치하고 의료진을 교육해야 하며 병원 정보시스템과도 연동해야 한다. 시술 과정과 책임 소재까지 정리해야 하는 만큼 경쟁력은 기술 자체에만 머물지 않는다. 교육과 사후 지원, 영업력, 주요 의료진과의 네트워크가 함께 뒷받침돼야 한다.
헬스케어가 글로벌 산업인 동시에 로컬 산업이라는 설명도 눈길을 끈다. 국가마다 규제와 보험 체계, 병원 운영 방식, 구매 절차, 환자의 기대가 다르다. 미국에서 성공한 사업 모델이 한국이나 유럽에서도 그대로 통한다고 보기 어려운 이유다. 헬스케어 기업의 해외 진출은 단순한 번역을 넘어 제도에 맞춘 재설계와 임상 환경에 따른 재맥락화에 가깝다.
빅테크 기업의 헬스케어 전략도 같은 결론으로 이어진다. 아마존과 애플, 삼성은 병원을 직접 장악하기보다 배송 서비스와 스마트워치 등을 활용해 소비자와 만나는 접점을 넓히고 있다. 다만 저자는 헬스케어를 장밋빛 성장 산업으로만 바라보는 시선을 경계한다. "헬스케어는 기술만으로 움직이지 않는다. 데이터가 있어도 행동 경로가 필요하고, 소비자 경험이 좋아도 의사와 보험자의 인정이 필요하며, 플랫폼이 있어도 지불 모델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결국 이 책은 헬스케어 산업의 복잡한 진입 장벽을 이해하도록 돕는 입문서다. 헬스케어 비즈니스를 제대로 바라보려면 '기술이 얼마나 뛰어난가'라는 질문에만 머물러서는 안 된다. 누가, 왜 이 기술을 사용해야 하는가. 환자의 삶과 치료 결과를 실제로 바꿀 수 있는가. 그리고 그 비용은 누가 지불할 것인가.
헬스케어 비즈니스의 법칙|김치원 지음|클라우드나인|284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