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드웨어 제조 산업 전반에서 '경량화'가 기업의 소재 경쟁력과 기술력을 가늠하는 지표로 떠오르고 있다. 고성능을 유지하면서도 무게를 덜어내는 것은 신소재 발굴, 내부 구조 설계, 발열·내구성 관리 역량을 고루 갖춰야 하는 작업이기 때문이다.
31일 업계에 따르면 이 같은 경량화 트렌드는 고부가 제조 산업에서 가장 뚜렷하게 목격된다. 특히 항공우주 분야에서 무게는 곧 연료 효율과 운항 비용, 안전성을 좌우한다. 보잉 787과 에어버스 A350은 동체와 날개 등 주요 구조에 탄소섬유 복합재를 대량 채택했다. 스페이스X 역시 '팰컨 9' 로켓 1단의 재사용 과정에서 자세 제어와 착륙 정밀도를 높이기 위해 가볍고 고온에 강한 티타늄 그리드 핀을 적용했다.
무거운 배터리를 품어야 하는 전기차 시장에서도 경량화는 연비 및 주행거리 연장과 직결된 생존 과제다. 테슬라 모델 S가 차체 구조에 알루미늄을 쏟아부어 배터리 중량 부담을 낮췄다면, 현대차그룹은 아이오닉5 N과 아반떼 N 등 고성능 모델의 스포일러와 사이드미러, 머플러에 탄소섬유강화플라스틱(CFRP)을 탑재해 차체 경량화와 공력 성능을 한 번에 끌어올렸다.
이처럼 기업들의 소재 경쟁이 확산하면서 글로벌 항공우주 복합재 시장은 2025년 392억8000만달러에서 2034년 1059억달러(약 146조원)로, 글로벌 자동차 경량 소재 시장은 2025년 1429억8000만달러에서 2034년 1863억1000만달러(약 257조원) 규모로 커질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경량화' 움직임은 생활 가전 시장에서도 포착된다. 일례로 무선 청소기 'LG 코드제로 A5'는 본체에 고강도 플라스틱 소재 ABS를 적용해 무게를 1.1㎏까지 줄였다. 손목에 부담이 있거나 무거운 청소기 사용이 불편한 시니어층도 부담 없이 사용할 수 있도록 만든 것이다. ABS는 내열성과 내충격성이 우수하고 가공성과 색상 구현력이 뛰어나 자동차, 가전, IT 기기 등 다양한 제품 소재로 활용되고 있다.
노트북 시장도 경량화에 대한 고민이 치열하다. 특히 인공지능(AI) PC 확산으로 고성능 신경망처리장치(NPU), 대용량 배터리, 발열 제어가 동시에 요구되는 가운데 소비자들의 대형 디스플레이 선호 현상까지 겹치면서 경량화가 기업들의 과제가 됐다.
2014년 초경량 노트북 시장을 연 LG전자는 항공우주 신소재에서 착안한 '에어로미늄'을 채택하며 돌파구를 마련했다. 알루미늄과 마그네슘 합금 기반의 이 신소재는 기존 마그네슘 합금보다 가벼우면서도 구조적 강성과 스크래치 저항력을 높였다. LG전자가 올해 초 출시한 'LG 그램 프로' 16인치 모델은 이 신소재를 전면 도입해 무게를 1199g으로 맞추는 데 성공했다.
황윤희 LG전자 PC상품기획팀장은 "초경량 정체성을 지키면서도 사용자가 체감할 수 있는 성능을 내기 위해 엔지니어링 차원에서 불필요한 요소는 덜어내고 작은 나사 하나까지 분석해 완성도를 높였다"며 개발 비화를 전했다. LG 그램은 올해 1분기 국내 B2C(기업·소비자 간 거래) 노트북 시장에서 약 15만5000대의 출하량을 기록하며 점유율 1위를 차지하기도 했다.
업계 관계자는 "모바일과 TV, 생활가전에 이르기까지 첨단 신소재와 정밀 구조 설계 기술이 전방위로 파급되고 있다"며 "차세대 하드웨어 시장에서 가벼움은 단순한 휴대성 향상을 넘어 제조사의 소재 제어 능력과 기술적 완성도를 입증하는 무기가 되고 있다"고 진단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