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버넌스포럼 세미나서 상사법원 도입 제안
국내에도 미국 델라웨어 형평법원(Delaware Court of Chancery)처럼 기업 지배구조와 관련된 분쟁을 전문적으로 다루는 이른바 '상사법원'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2~4년마다 순환근무를 하는 현 체제에선 법관이 전문성을 쌓기조차 어려운 만큼 상사법원 설립을 통해 전문법관의 장기 근무를 보장하고 가처분부터 본안소송까지 사건을 일관되게 처리할 필요성이 있다는 지적이다.
김재남 인천지방법원 판사는 29일 여의도 금융투자교육원에서 한국기업거버넌스포럼 주최로 열린 '주주 충실의무와 상사특별법원 도입' 세미나에서 "상사 사건의 전문성, 글로벌 트렌드에 맞춰 빠르게 변화하고 있는 점, 국가경쟁력에 있어서 차지하는 중요도 등을 고려하면, 일반 민사법원과 별도로 전문법원을 설립할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현재 한국에는 가정법원, 행정법원, 회생법원, 특허법원 등 4개 전문법원이 있다.
먼저 김 판사는 "상사 사건을 제대로 처리하기 위해서는 경제학, 경영학, 회계학, 금융 등 다른 학문이나 실무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면서 "기업의 의사결정과 관련된 상사 사건은 지배주주, 소수주주, 경영진, 노동자, 채권자 등 회사를 둘러싼 다양한 이해관계자가 존재하고 이들 사이의 이해관계 조정을 해야 한다"고 전문성이 필요한 상사 사건의 특징을 설명했다. 그는 "(상사사건은) 회사의 경영과 금융 관련 제도들은 경영환경의 변화, 금융산업의 발전 등에 따라 가장 빠르게 변화하는 영역"이라며 "상사 관련 법률과 제도는 이와 함께 지속적으로 변화하고 발전하고 있다"고 언급했다.
다만 이러한 특성으로 인해 가장 전문성이 요구되는 재판임에도 불구하고, 현 제도와 시스템에선 전문성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는 지적이다. 김 판사는 "우리나라 법관은 전국을 크게 서울, 수도권, 지방 권역으로 삼등분해 2~4년마다 권역을 이동하거나 권역 내 법원을 이동하는 순환근무 제도"라며 "같은 법원에 근무하더라도 법관의 구체적 사무분담이 변경돼 다른 종류의 재판을 담당하게 된다"고 꼬집었다. 이는 재판의 공정성을 제고하고 법원 인사의 형평성을 유지하기 위한 조치지만, 결국 전문성을 쌓기 어렵게 만든다는 설명이다.
특히 김 판사는 이러한 상황을 의사가 2~3년마다 전공과목을 옮기고, 해당 과목을 진료하면서 다른 과목의 진료까지 같이 하는 경우에 빗댔다. 그러면서 "그 의사를 믿고 중요한 암 수술 등을 맡길 수 있겠느냐"고 반문했다.
더욱이 현재 기업 전문재판부가 설치돼 있는 법원조차 전문재판부의 기업사건 비율이 높지 않은 것으로 확인됐다. 김 판사에 따르면 2020년2월29일 기준으로 서울중앙지방법원 기업 전문재판부의 전담사건 비율은 32~44%에 불과하다. 그는 "국민들에게 전문적인 상사 재판을 제공하기 위하여 인사시스템 전반을 흔들지 않는 범위 내에서 일부 조정이 필요하다"고 부연했다.
해외에서 회사법, 증권법 관련 재판을 담당하는 상사전문법원으로는 미국 델라웨어 형평법원, 네덜란드 기업법원, 이스라엘 텔아비브 전문재판부 등이 손꼽힌다. 국내에 가장 잘 알려진 델라웨어 형평법원의 경우 기업 분쟁만을 처리하게 만들어진 상사법원은 아니지만, 기업 지배구조와 관련한 분쟁을 오랜 기간 담당하면서 법관 전문성이 축적되고 일관된 판례가 형성될 수 있었던 사례다. 법관들은 순환보직 없이 12년의 임기를 보장받는다.
이날 발표에서 김 판사는 이스라엘의 사례도 별도로 언급했다. 그는 2010년 텔아비브 지방법원에 경제 관련 분쟁에 전문성을 가진 판사 3명으로 구성된 전문재판부를 만들고 해당 재판부가 관련 사건만 다루게 한 뒤, 소송기간 중간값이 1601일에서 634일로 현저히 개선됐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는 "전문재판부 설치로 법원 전체의 효율성이 향상된 것"이라며 "소송의 조기 단계에서 기각판결을 한 비율, 조기에 합의에 이른 건수가 증가했다"고 말했다.
김 판사는 "충실의무 등 법전에 마련돼 있는 규범을 실현해 기업지배구조를 개선하고 코리아 디스카운트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전문적인 재판을 제공할 수 있는 상사전문법원을 설치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주장했다.
구체적으로 "상사전문법원은 일반법원에 전문재판부만 구성하기보다는 별도의 전문법원을 만드는 것이 바람직하다"며 "현 법관의 인사체계상 전문성 있는 법관을 배치하기 용이하고, 직원의 전문성을 쌓기에도 좋으며, 전문인력을 배치하고 별도 기관의 단일한 조직 힘을 전문재판 개선에 쏟기에도 유리하다"고 했다.
아울러 "법관은 전문성을 최우선으로 고려해 배치하고 가급적 장기간 상사전문법원에 근무할 수 있도록 할 필요가 있다"면서 "되도록 하나의 분쟁은 가처분부터 본안까지 관련 사건을 모두 동일한 재판부에서 담당하도록 해야 한다"고 제언했다. 이밖에 전문인력으로 회계전문가를 두고, 상사전문법원의 판결이나 임시지위가처분결정 등도 원칙적으로 공개할 필요가 있다고도 부연했다. 이는 전문판사가 친기업 편향을 보일 수 있다는 우려를 고려해 시장참여자 누구나 연구, 비판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방침으로 풀이된다.
같은 날 발표자로 나선 송옥렬 서울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전문법원 설립보다 법관 인사 시스템이 핵심이라고 지목했다. 송 교수는 "전문법원·전문재판부가 전문성 없는 법관으로 구성된다면 이는 재판전문화의 본질을 놓친 것"이라며 "상사법원을 만들더라도 법관이 순환근무를 계속하면 재판의 전문성을 높이기 어렵다"고 꼬집었다. 그는 전문법원 대신 기존 전담재판부를 강화하되, 법관이 해당 분야에서 전문성을 쌓을 수 있다면 전문법원과 비슷한 효과를 낼 수 있다고 설명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