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 엘리엇 국제투자분쟁 최종 패소에도
국민연금 의결권 행사 등 제소 위험 보호효과
"리밸런싱 논란 등 정치적 독립성 여전한 숙제"
정부가 엘리엇과의 국제투자분쟁(ISDS)에서 최종 패소해 약 1530억원을 물게 됐으나, 1800조원의 국민 노후자금을 운용하는 국민연금은 역설적으로 투자활동 부담을 덜게 됐다. 영국 법원이 국민연금을 '국가기관이 아니다'라고 못 박으면서 의결권 행사 등 투자활동은 ISDS 대상이 되기 어렵다는 법리가 마련됐고, 이에 따라 수탁자책임·스튜어드십 강화를 요구받는 국민연금의 국내 투자 보폭이 넓어질 것이란 관측이 나온다.
법무부는 지난 28일 환송중재 패소 판정을 수용하면서 "추가로 소요될 비용 등 여러 가지 사정을 종합적으로 검토한 결과"라고 밝혔다. 법무부는 영국 법원이 국민연금을 국가기관으로 보지 않은 점을 이번 분쟁의 성과로 꼽았다. 국민연금의 의결권 행사 등 투자활동은 ISDS 대상이 될 수 없다는 법리가 확립돼, 향후 유사한 제소에 대한 방어 근거를 확보했다는 설명이다. 정부는 판정 직후인 지난 1일 낸 보도자료에서도 영국 법원 취소소송을 통해 같은 법리를 확립했다고 밝혔다.
앞서 2월 ISDS 중재판정 취소소송에서 승소 판결을 받은 직후에도 정부는 "최대 1800조원 상당의 연금을 운용하며 수백, 수천개의 주식회사 주식을 보유한 국민연금 투자활동이 정부 조치로 간주하면서 잠재적인 ISDS 대상이 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고 설명한 바 있다. 국민연금이 해외 투자자까지 고려해 투자하거나, 이로 인한 투자활동 위축과 수익성 악화를 겪을 수 있었다는 설명이다.
국민연금의 수탁자책임 활동은 확대일로다. 스튜어드십 코드는 도입 10년 만에 개정돼 적용 자산이 채권·부동산·비상장주식 등으로 넓어졌고 2027년 시행된다. 국민연금도 위탁운용사의 의결권 행사와 기업 관여 활동을 질적으로 평가해 자금 배정과 회수에 반영하는 체계를 도입했다. 상법 개정으로 이사의 충실의무가 명문화되고 집중투표제와 자사주 소각 의무화가 추진되는 등 코리아디스카운트 해소를 위한 제도 변화도 속도를 내고 있다. 투자은행(IB) 업계 관계자는 "외국계 행동주의 펀드와 맞서는 안건에서 제소 부담이 줄었다는 점은 코리아디스카운트 해소를 위한 국민연금의 움직임에 힘을 실을 수 있다"고 말했다.
제소 부담은 덜었지만…정치적 독립성은 여전히 의문
이번 판결로 국민연금이 국가기관이 아니라는 인정을 받았지만, 정치적 독립성은 여전한 문제로 남았다는 평가도 나온다. 영국 법원은 국민연금을 국가기관으로 보지 않으면서도 대통령, 청와대, 복지부 장관 등이 국민연금 측에 합병 찬성 지침이 전달되도록 한 사실은 인정했다. 투자위원회가 독립적으로 결정하지 못하게 하려는 목적이라는 취지다. 환송중재 판정부 역시 정부 개입이 없어도 합병이 가결될 상황이었다면 고위 인사가 형사책임을 감수하며 개입할 이유가 없었다고 보고 인과관계를 인정했다. 법적 지위와 실제 의사결정의 독립은 별개라는 얘기다.
실제로 국민연금 운용을 둘러싼 독립성 논란은 현재 진행형이다. 국민연금은 1월 국내주식 리밸런싱을 6월 말까지 유예했고, 5월에는 국내주식 목표 비중을 14.9%에서 20.8%로 높였다. 유예 결정 때부터 독립성 논란이 있었고, 코스피가 6월 9000선을 찍은 뒤 급락하면서 책임론이 커졌다. 14일 국정감사에서 야당은 정부의 증시 부양 기조에 국민연금이 동원됐다는 의혹을 제기하며 회의록 공개를 요구했고, 김성주 이사장은 "두 결정 모두 만장일치였다"며 정치적 압력 의혹을 부인했다. 여당 역시 대규모 매도에 따른 시장 충격을 막기 위한 판단이었다고 반박하는 등 공방이 계속되고 있다.
이번 판결이 확인된 것은 국민연금의 법적 지위일 뿐, 실제 운용 과정에서 정부·정치권의 영향력을 어떻게 차단할지는 여전히 별개의 과제로 남아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업계 관계자는 "외부 제소 위험을 막는 법리를 확보했다는 정부의 평가에도 일리는 있다"면서도 "정부·정치권의 기금운용 개입 논란이 정권이 바뀔 때마다 반복되고 있고, 정치적 개입 통로를 줄이는 장치가 없으면 보폭 확대는 실효성을 얻기 어려울 수 있다"고 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