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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금조달 우회로]①기업어음시장에 몰리는 대기업들…1분기에만 21.4조원 발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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롯데·SK 등 계열사 지원, 실적 악화로 자금 수요 늘어
저신용 기업들 자금조달 창구…차입금 만기구조 단기화

편집자주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시작된 가파른 금리 인상은 기업의 자금 담당자들을 당황스럽게 만들었다. 미국을 비롯한 각국 정부가 언제까지 얼마나 금리를 올릴지 한치 앞을 예상하기 어려운 상황이 이어졌다. 레고랜드 사태와 부동산 프로젝트파이낸싱(PF) 부실 공포에 금융 안정성이 흔들리면서 자금 시장도 요동쳤다. 불안한 시장 환경에서 신용도가 상대적으로 낮은 기업들은 물론 우량 대기업들도 기업어음(CP), 사모 회사채, 옵션부사채 등 공모 회사채가 아닌 자금 조달 우회로를 찾아 나섰다.

자금시장 경색 상황에서 만기 1년 이하의 단기자금 조달 수단인 기업어음(CP)과 전자단기사채(STB)는 기업들의 주요 자금 조달 수단이 됐다. 4일 한국예탁결제원에 따르면 국내 일반기업(금융회사, 협회, 재단 등 제외)이 올해 들어 1분기 말까지 발행한 CP(STB 포함)는 총 21조4000억원 규모다. 증권사 등의 금융회사가 발행한 CP까지 포함하면 국내 CP 잔액은 145조원에 이른다. 지난해 3월 말 122조원에서 1년 만에 잔액이 23조원가량 증가했다. 같은 기간 만기 도래액을 제외한 순발행 규모는 2조원 남짓이다.


만기 1년 미만의 단기 CP를 발행할 때는 증권신고서 제출 등의 복잡한 절차를 생략할 수 있다. 조건이 맞는 브로커(할인기관)와 투자자가 확보되면 선(先)이자를 떼고 곧바로 자금을 빌리면 된다. 이와 달리 차입금 만기 상환일이 빠르게 돌아오는 차입금 만기의 단기화는 회사의 유동성 상태를 악화시킨다. 이러한 특성 때문에 CP는 주로 급전이 필요한 기업이나 안정적으로 회사채를 발행하기 어려운 기업이 공모 회사채의 대체 자금 조달 수단으로 많이 활용했다.


올 들어 롯데 3조500억, SK 3조490억원어치 CP 발행

대기업 계열 그룹 중에서는 롯데그룹의 CP 발행이 가장 두드러졌다. 롯데그룹은 올해 들어 총 3조5000억원의 CP를 발행했다. 계열사별로는 롯데쇼핑이 1조2000억원어치로 가장 많은 양의 CP를 발행했고, 롯데지주(8030억원), 호텔롯데(6500억원), 코리아세븐(3400억원) 등이 뒤를 이었다.


롯데그륩의 단기자금 조달이 늘어난 것은 롯데케미칼 유상증자와 롯데건설 자금 지원 등으로 유동성 확보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롯데케미칼은 올해 초 실적 악화와 일진머티리얼즈 인수 등으로 1조2000억원의 주주배정 유상증자를 실시했다. 증자에는 1대 주주인 롯데지주와 2대 주주인 롯데물산 등이 참여했다. 또 롯데물산과 호텔롯데, 롯데정밀화학 등은 롯데건설이 메리츠증권과 조성한 롯데건설 우발채무 지원용 1조5000억원 규모의 펀드에 6000억원 규모의 후순위 대출을 집행했다.


건설 사업장 우발채무 우려로 부도설까지 나돌았던 롯데건설은 2000억원 규모의 CP를 순상환했다. 3000억원 내외의 CP 만기가 도래했지만, 부동산 PF에 대한 우려로 자체적으로 자금을 조달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롯데그룹 계열사와 메리츠증권이 펀드를 조성해 PF 우발채무를 해결해 주면서 롯데건설에 대한 우려가 많이 잦아들었다.



SK그룹이 3조490억원어치의 CP를 발행해 롯데그룹의 뒤를 이었다. 지주사인 SK가 1조450억원, SK텔레콤이 9000억원, SK이노베이션 4000억원 등 주요 계열 3개사가 발행한 CP 물량이 2조원을 넘어선다. SK그룹은 레고랜드 사태 이후 자금 시장이 경색되자 CP를 대규모로 발행했다가 시장이 진정되는 올해 초부터 회사채를 발행해 CP를 상환해왔다. 단, SK하이닉스 등 그룹 계열사 실적 악화로 1분기에만 총 5조1740억원 규모의 회사채를 발행하는 등 공격적인 차입 기조를 이어가고 있다.


LG그룹(1조6050억원), CJ그룹(1조5850억원), 한화그룹(1조2162억원), 신세계(1조2510억원), 삼성그룹(1조1750억원) 등의 1분기 CP 발행액이 1조원을 넘었다. IB업계 관계자는 "원자재 가격 상승 등으로 일시적인 운영자금 부담이 증가하거나 금리 변동성이 커지면서 금리 안정을 기다렸다가 회사채를 발행하려는 기업들이 CP 시장을 많이 찾았다"고 설명했다.


A2급 기업들, 공모 회사채 대신 CP

상대적으로 신용도가 낮은 기업들도 공모 회사채의 대체 자금 조달 수단으로 CP 시장을 많이 활용했다. 단기 신용등급 중 최우량 등급인 A1에서 1~3계단 낮은 A2+, A2, A2-의 등급을 보유한 기업들의 CP 발행이 많았다.


A2+ 등급에서는 신세계디에프가 3100억원으로 가장 많은 CP를 순발행했다. LG디스플레이(3000억원), 넷마블(1100억원), 효성티엔씨(1500억원), 코리아세븐(800억원) 등이 CP로 단기 유동성을 많이 확보했다. A2 등급에서는 효성첨단소재(3450억원), 하이트진로홀딩스(2600억원)의 CP 발행량이 많았다. A3 등급에서는 메가박스중앙이 CP를 발행해 997억원어치의 유동성을 확보했다.


효성그룹은 그룹 계열사의 실적 악화 등으로 공모 회사채 발행이 쉽지 않은 상황이다. 연초 효성화학이 공모 회사채 수요예측에서 기관 투자자들의 투자 수요를 모으지 못해 전액 미매각된 바 있다. 산업은행 지원으로 유동성은 확보했지만, 공모 회사채 발행 가능성을 낙관하기는 어렵다. 효성첨단소재와 효성티앤씨 등이 CP 시장에서 수천억원의 유동성을 확보한 이유다.


회사채 시장 관계자는 "실적 악화와 신용도 하락 가능성으로 회사채 발행이 부담스러운 저신용도 기업들은 CP 이외의 자금 조달 수단이 마땅치 않은 상황"이라며 "신용도에 비해 금리 매력도가 높은 A2급 기업들은 CP 시장에서 유동성을 확보할 수 있지만, A3급 이하 기업들은 단기 유동성 확보도 쉽지 않은 상황이 이어지고 있다"고 평가했다.


신용평가사 관계자는 "차입금이 많은 기업이 CP 발행을 많이 늘릴 경우 차입금 만기가 빨리 돌아오는 만기구조 단기화 현상 때문에 자금 조달을 자주 해야 하는 입장에 처한다"면서 "과도한 단기자금 조달이 다시 신용도에 악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회사채 등으로 차입금 만기를 장기화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임정수 기자 agrement@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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