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 70% "독립성 부족한 이사회가 최대 문제"
현장 정착 점수 평균 54.1점…"절반의 성공" 평가
주총서 우회 정관 잇따라 통과…"후속 입법·판례 보완"
"법은 바뀌었지만 기업의 의사결정 구조 자체는 아직 충분히 바뀌지 않았다."
개정 상법 시행 후 지난 1년간 국내 자본시장을 지켜봐 온 전문가들의 평가는 '절반의 성공'으로 요약된다. 기업들의 주주환원이 확대되고 제도 측면에서 주주권이 강화됐다는 데는 의미를 부여하면서도 기업 지배구조의 핵심인 이사회는 여전히 제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현장에서는 실무적용을 위한 유권해석 등이 매우 부족하고 단기간에 기업 부담이 급증했다는 토로도 확인된다.
22일 아시아경제신문이 개정 상법 시행 1년을 맞아 자본시장 전문가 2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 결과, 전체 응답자의 70%가 현 기업지배구조에서 가장 큰 문제점으로 '독립성이 부족한 이사회(복수응답)'를 꼽았다. 이어 '지배주주 중심 의사결정(60%)' '소수주주 보호 미흡(50%)' 순이었다. 이남우 한국기업거버넌스포럼 회장은 "이사회 질적 개선이 장기 과제"라며 "식물 이사회로 전락하는 게 가장 우려된다"고 지적했다.
익명을 요구한 한 전문가는 "많은 상장기업이 이사회의 역할, 주주와의 소통, 자본배분 정책 등을 이전보다 적극적으로 고민하기 시작한 것은 분명한 변화"라면서도 "가장 우려되는 것은 제도의 형식화"라고 짚었다. 기업들이 기업가치 제고보다 법적 책임을 회피하는 데 집중하거나, 투자자가 단기적 주주환원에만 목소리를 높일 경우 개정 상법의 본 취지는 퇴색될 수밖에 없다는 설명이다.
이번 설문에서 전문가들이 매긴 개정 상법의 초기 현장 정착 수준은 100점 만점에 평균 54.1점으로 집계됐다. 최고점은 85점, 최저점은 5점으로 평가가 엇갈렸지만 70점 이상을 준 응답자가 8명에 달하는 등 방향성 자체에 긍정적 의미를 부여하는 의견이 적지 않았다. 다만 최저점 5점을 제시한 한 전문가는 "상법상의 법리보다는 정치적 판단으로 조급하게 만들어진 탓에 실무적용을 위한 유권해석 등이 매우 부족하다"며 "종전 법체계 중 일부만이 변경돼 공시규제와의 정합성도 낮다"고 비판했다.
상당수 전문가는 이미 기업들 사이에서 제도 취지를 우회하려는 움직임이 확인됐다는 점을 공통적으로 지적했다. 김우찬 고려대학교 경영대 교수(50점)는 지난 주주총회 시즌에 상당수 기업이 이사 수 상한을 낮추거나 새로 설정하는 정관개정안을 제안했던 사실을 언급하며 "상법 개정을 무력화하려는 시도들이 가장 우려됐는데, 우려가 현실이 됐다"고 지적했다. 법무법인 클라스한결의 김광중 변호사(30점) 역시 "개정 취지에 반해 이를 회피하고자 하는 정관 변경 등이 이뤄졌다"고 꼬집었다.
올해 정기주총에서 개정 상법의 취지에 부합하지 않는 정관 변경 안건 가결률은 90%를 웃돈 것으로 나타났다. 얼라인파트너스자산운용이 코스피200 상장사 주총안건을 분석한 결과 '이사 임기 유연제' 안건은 21건 중 20건(95%), '이사회 정원 축소 및 상한 설정' 안건은 25건 중 23건(92%)이 가결됐다. '자기주식의 경영상 목적 활용' 안건의 가결률은 100%(26건)였다. 이는 개정 상법에 따라 오는 9월부터 의무화되는 집중투표제를 무력화하고 외부 인사의 이사회 진입 가능성을 축소하는 등 지배주주의 지배력 강화에 활용될 수 있는 안건으로 분류된다.
앞서 아시아경제가 공시대상기업집단 상위 10개 그룹의 상장사와 계열 상장사 등 100곳을 대상으로 이사회 안건의 사외이사 찬반 현황을 전수조사한 결과에서도 총 2929개 의결 안건 가운데 반대·보류 의견이 실제 부결 또는 보류로 이어진 안건은 8건에 그쳤다. 전체의 0.3%에도 미치지 못하는 수준이다. 개정 상법으로 이사회의 책임이 한층 커진 반면, 이사회의 견제 기능은 여전히 제한적임을 시사하는 결과다.
소액주주 행동주의 플랫폼 액트를 운영하는 이상목 대표는 "좋은 방향으로 가고 있으나 아직 기업의 인식은 과거에 머무르고 있다"며 "기업의 행동을 변화시킬 수 있는 실무적 디테일이 결여된 문제를 반드시 해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김민국 VIP자산운용 대표는 "이사들이 소송 리스크를 의식해 예전보다 긴장하고, 주주와의 소통에 열려 있는 자세로 바뀐 것은 분명한 진전"이라면서도 "주주에 대한 충실의무가 구체적으로 어떤 경우 위반인지에 대한 가이드라인과 판례는 아직 부족하다"고 짚었다. 그는 "자사주 스와프 같은 편법적 지배력 강화가 '전략적 제휴'라는 명분 뒤에 숨어 계속되고, 이사회가 거수기 역할에 머무는 경우도 많다"고 덧붙였다.
일각에선 기업의 수용 가능성을 함께 고려하는 한편, 안정적인 경영 활동을 위해 법적 예측 가능성을 높이는 후속 보완이 시급하다는 목소리도 제기된다. 익명을 요구한 한 응답자는 "(상법 개정 시) 시행 시기별 해소해야 할 실무적인 제한 및 문제점을 기업의 수용 가능성 등을 고려하면서 선제적으로 해소했어야 했다"면서 가장 도입이 시급한 제도로 상법 중 회사법 독립, 상장회사법 제정 등을 언급했다. 재계단체 관계자 역시 "(기업들이) 안정적인 경영 활동을 펼치기 위해서는 법적 예측 가능성을 높여야 한다"며 "경영판단원칙 명문화 등 기존 개정 사항에 대한 보완 입법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