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가치사슬 상단 분야 부재
옮겨 탈 섹터 없는 국내 증시
내년 상반기 소외 우려
최근 고금리 환경 속에서 미국 뉴욕증시가 고공행진을 이어가는 반면 코스피 지수는 박스권에 갇혀 있다. 인공지능(AI) 테마가 인프라 투자에서 수익화 단계로 이동하면서 한미 간 AI 밸류체인(가치사슬) 구조의 격차가 드러난 결과라는 지적이 나온다.
12일 iM증권에 따르면 미국은 AI 가치사슬 상단에 ▲응용프로그램(팔란티어·서비스나우) ▲사이버 보안(크라우드스트라이크·팔로알토) ▲클라우드 플랫폼(M7) ▲반도체 설계(엔비디아·브로드컴·마벨) ▲반도체 설계 자동화(시놉시스·케이던스) 등 5개 분야에 대표 상장사들이 포진해 있다. 반면 한국은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메모리, 장비 등 제조 영역에만 산업이 집중돼 있다.
미국의 상단 기업들은 재고와 설비 부담이 적고 높은 고객 유지율과 구독형 매출 구조를 가져 메모리 가격이 하락해도 직접적인 타격을 받지 않는다. 대표적으로 반도체 설계기업 마벨은 생산을 파운드리에 위탁하는 팹리스(반도체 설계 전문) 구조로 데이터센터 매출 비중이 79%에 달하며, 반도체설계자동화(EDA) 분야는 시놉시스·케이던스·지멘스 3사가 세계 시장의 70~80%를 점유하고 있다. 이들 기업은 매출의 80~85%가 구독형 반복 매출이며 고객 유지율도 100%에 가깝다.
반면 한국은 메모리 종합반도체기업(IDM) 중심으로 설비투자와 재고를 직접 떠안는다. 이 때문에 공급 과잉 시 평균판매단가(ASP) 하락과 재고 평가손이 그대로 이익을 깎는다. 같은 AI 수혜라도 상단 기업은 마진이 확대되지만 하단 기업은 가격 사이클에 노출되는 구조적 한계가 있다. 코스피 지수의 반도체 쏠림도 문제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합산 시가총액은 코스피의 절반을 넘는 반면 미국 S&P500 내 반도체 비중은 약 18%에 불과하다.
상단 섹터가 비어 있다 보니 미국 시장에서 섹터 순환매가 일어날 때 한국 증시에는 이에 상응하는 섹터와 기업이 부재한 경우가 많다. 미국 자금이 인프라 설비투자 수혜주에서 AI 활용 및 클라우드 진영 등으로 이동하더라도 미국 지수는 지수 내부의 섹터 교체만으로 상승세를 이어갈 수 있다. 반면 한국은 자금이 옮겨 탈 수 있는 상단 섹터가 없어 자금이 증시 밖으로 유출된다. 미국의 순환매는 지수 안에서 일어나는 반면 한국의 순환매는 지수 밖으로 자금이 빠져나가는 셈이다.
외국인 수급 역시 이러한 섹터 순환매가 이미 시작되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외국인 수급이 돌아오지 않고 있는 것은 자금을 AI 인프라에서 그 외 섹터로 자산 배분하고 있는 과정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 과정에서 한국은 매도 재원으로 활용될 수밖에 없으며, 외국인이 AI 인프라 비중을 줄이는 결정은 곧 한국 증시 비중 축소로 직결된다.
투자 증가율의 둔화세도 부담 요인이다. 인프라 기업의 주가는 설비투자의 절대 금액이 아닌 증가율에 반응한다. 빅테크(대형 정보기술 기업)의 투자 규모 자체가 늘어나더라도 증가율이 꺾이는 순간 가치사슬 하단에 위치한 기업의 주가는 먼저 정점을 확인한다. 하이퍼스케일러들의 분기별 설비투자 증가율은 올해 3분기를 기점으로 정점을 지날 전망이다.
결국 한국은 AI 사이클에서 중간재 공급자 위치에 머물러 있어 AI 시장이 수익화 및 활용 단계로 넘어갈수록 상대적 강도가 약해질 수밖에 없다. 전력기기와 기판 등 AI 물리 인프라 영역에서 수혜를 받는 분야도 있지만 삼성전자 · SK하이닉스 에 비해 지수 내 비중이 작아 증시 전체의 소외 우려를 상쇄하기에는 역부족이다.
증권가에서는 AI 수익화 국면 전환과 고금리 뉴노멀 속에서 국내 반도체 기업들의 이익 지속성이 증시 반등의 열쇠가 될 것으로 보고 있다. 김준영 iM증권 연구원은 "내년 상반기가 AI 적용 단계로 넘어가면서 소프트웨어 및 보안 등 적용 계층이 수혜를 받는 동안 해당 계층이 부족한 한국 증시의 소외 우려가 가장 커질 수 있다"며 "다만 AI 적용 확대에 따른 토큰 소비 급증으로 추론 설비가 다시 부족해지면 하반기에는 메모리와 AI 인프라가 다시 수혜를 받는 선순환을 기대할 수 있다"고 밝혔다. 이어 "상반기 상대 성과 부진에 대비해 메모리 쏠림을 줄이고 고대역폭메모리(HBM)와 전력 인프라 중심으로 방어한 뒤 하반기 반등을 준비하는 전략이 유효하다"고 조언했다.
황수욱 메리츠증권 연구원은 "고금리 환경이 쉽게 꺾이기 어렵기 때문에 기회는 비용보다 높은 성장을 보여주는 AI 인프라 안에서 찾아야 한다"며 "한국 반도체 주가가 글로벌 빅테크 랠리에도 부진한 본질적 원인은 이익 모멘텀의 부재로, 지수가 반등하기 위해서는 2028년까지 3년 연속 이익 성장을 이어갈 수 있다는 시장 전망치 형성이 관건"이라고 평가했다.




